Sanha Cheong
physicist.in.training / education.enthusiast

하나의 마을과 같다

"입자물리 연구소를 만드는 데에는, 물리학자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Jun 07, 2019
Original Post
Written by Lauren Biron
Translated by Sanha Cheong

일러스트: Sandbox Studio (시카고); Connie Mucha

고등 교육 과정 내내, Jamie Antonelli 는 늘 본인이 언젠간 물리학과 교수가 될 것이라고 꿈꿨다. 그의 롤모델들은 모두 교수님들이었고, 그의 동료들은 모두 교수가 되기 위해 열심이었고, 그의 연구도 교수직이라는 커리어를 위한 과정이었다.

“저만의 거품 안에 갇혀살았던 거죠.” 라고 는 말한다. “고개를 숙인채, 주위 사람들이 따라가는 길만을 따라간 거에요. 제 미래에 대한 솔직한 고찰을 한 게 아니라요.”

매해, 같은 학생 몇백명이 입자물리학 박사학위를 들고 졸업한다. 그리고, 매해 {미국 내} 대학이나 연구 기관에서 십수개 정도의 장기고용 정규직으로서의 물리학자 자리가 생긴다. Antonelli 와 그와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이 여러 라운드의 지원서와 낙방 경험을 거치고서야 깨닫게 되는, 가혹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박사 학위 소지자 물리학자 대부분은, 물리학계를 떠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Antonelli 를 비롯한 그런 물리학자들 중 다수는, 데이터 사이언스에서 본인의 커리어를 이어나가곤 한다. 물론, Antonelli 와 같이 본인의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학계에서, 기초 연구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왔다면,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다.

이번 Symmetry 기사에서는 데이터 사이언스 업계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는, Antonelli 와 그 외 3명의 물리학자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Jamie Antonelli

1999년, 고등학교 2학년의 Antonelli 는 고등학교 선생님이 볼링공과 달걀을 떨어뜨리는 실험을 하는 것을 보면서, 무거운 물체가 먼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물체는 동시에 떨어졌다.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 같았어요.” 라고 그는 말한다. “직관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있었던 거죠.”

그 수업 이후로, Antonelli 는 물리에 완전 빠져들어 열심히 공부했다. “최대한 깊이 파고들고 싶었어요. 물리학만큼 관심이 가는 분야는 없었죠. 언젠가 물리학 교수만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어요.”

재능이 있는 편이었던 Antonelli 는, 어딜 가나 작은 연못에 큰 물고기 같았다. 하지만, 노트르담 대학교 {University of Notre Dame} 에서 입자물리학 박사 과정을 시작하고, LHC {Large Hadron Collider, 대형 강입자 충돌기} 의 CMS 실험 협력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는 본인이 큰 바다에 입성했다는 걸 곧 깨닫게 됐다.

“CERN 에 와보니, 제가 더 이상 물리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물리는 순식간에, 놀랍도록 어려워졌어요. 수학적 깊이는 저를 제 지적 한계까지 몰아붙였고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엄청난 인생 경험이었죠. “

Antonelli 는 고등학교 시절 세운 꿈을 위해, 모든 도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포닥 {post-doc, 박사후 연구원} 5년차에 들어서면서, 본인의 선택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처음엔, 이 경쟁적인 문화가 동기가 됐어요. 쉴새 없이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 가운데서 빛나려 노력하는 그 과정이요.”

하지만 그는 그 똑같은 문화로 인해, 그와 그 동료들이 연구 외에 인생의 다른 부분을 무시하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됐다고 한다. “또, 무의식 중에 다들 우리 모두 굉장히 소수의 정규직 기회를 위해 경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이건 곧 엄청난 스트레스로 이어졌어요.”

Antonelli 는 결국 그 경쟁이 물리학계 내 친구와 동료들 사이의 전우애를 앗아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저도 함께 지원한 자리에서 제 친구들만 면접을 보게 되면, 진심으로 축하하기 어려워지더라고요. 학계 내 취업시장엔, 엄청난 과제들, 엄청난 실망, 그리고 엄청난 질투가 있어요. 사람을 극한으로 밀어붙이죠.”

Antonelli 는 다른 선택지를 찾기 시작했지만, 본인의 능력이 학계 밖에서 어떻게 쓸모있을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선택지를 고려하는 것만으로도, 본인의 꿈을 버리는 것 같았고 말이다.

“분야 특성상, 정말 동기가 강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돼요. 이 직업에 본인의 삶을 전부 투자하는, 그런 문화를 장려하게 되고요.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길에 제 인생을 쏟았고, 이미 너무 많은 투자를 해놓은 탓에, 방향을 트는 건 곧 실패를 의미하는 것 같았어요. 교수가 되는 건 제 정체성의 일부였고, 그걸 포기한다는 건 고통스러웠어요.”

그러던 Antonelli 는 물리학회에서 열린 취업 패널에 참석하게 되고, 물리학 밖의 세상에 새 눈을 뜨게 된다. 패널 진행자는 물리학계를 떠난 사람들도 대부분 무척 행복하게 살고 있고 돈도 {물리학계 사람들보다} 두세배나 많이 벌고 있는데, 물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현실이 부당하다고 했다.

“사실 학계에서의 생활 방식과, 학계 밖에서의 그것을 비교해본 적이 없었어요. 잘 살펴보니까, 교수직이 요구하는 일의 70 퍼센트는 저랑 잘 안 맞는 것들이더라고요. 원체 오랜 꿈이었다보니까, 제대로 살펴볼 생각도 안 했던 것 같아요.”

2017년, 그는 Insight Data Science Fellows 과정에 참여했다. Insight Data Science Fellows 과정은 전 ATLAS {LHC 에서 진행되는, CMS 와 비슷한 자매 실험} 물리학자가 운영하는, 과학자들이 학계에서 데이터 사이언스 산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돕는 7주짜리 훈련 과정이다. 프로그램 직후, Antonelli 는 헬스 케어 분야에서 취업하게 됐다.

Antonelli 는 이제 병원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분석하고, 헬스 케어 서비스의 성과를 평가하고, 이를 개선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는 일을 한다. 그의 최근 프로젝트 중 하나는, 병원들이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의 환자들에게 공평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일이었다.

그는 데이터 사이언스로의 전환을 고려하는 물리학계 내 학생들과 포닥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학계보다 세상은 훨씬 넓고, 여러분의 잠재적 커리어는 엄청 다양해요. 여러분은 굉장히 가치있는 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고, 딱 그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회사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Jennifer Hobbs

Jennifer Hobbs 는 초등학교 시절 과학시간에 의기소침하게 앉아있던 날을 되새기며 말한다. “모든 게 밝혀진 것 같았어요. 의학을 제외하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죠. ‘아, 세상은 이게 다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1995년, Hobbs 가 3학년이 되던 해, 뭔가 변화가 생겼다. 미국 에너지부 소속 페르미랩 {Fermi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 의 과학자들이 탑 쿼크라는 새로운 기초 입자를 발견한 것이다. “진짜 새로운 과학이었던 거죠.” 라고 Hobbs 는 회상한다. “아직 세상에 대해서 배울 게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3학년의 Hobbs 는 입자물리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했지만, 탑 쿼크의 발견은 그의 머리 속 깊이 각인되었다. 고등학교 내내 이공계 과목을 위주로 공부했고, 노스웨스턴 대학교 {Northwestern University} 에서도 폭넓은 통합 과학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그리고, 노스웨스턴 대학의 물리학과를 통해, 한참 어렸을 때 상상했던 페르미랩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매해 여름, 그리고 학기 중에 한두번씩, 페르미랩에 가게 됐어요. 전 회로와 전자기학을 너무 사랑했고, 미네르바 실험 {MINERvA, 중성미자 검측 실험} 을 위한 검측기를 만들면서 이런 지식과 기술을 배웠죠. 진짜 뜻깊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는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같은 교수 Heidi Schellman 의 지도하에 미네르바 실험에 참여하면서, 박사 과정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대학원에 진학한 뒤, 무엇인가 달라졌다.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물리학 연구에 대해서, 공학만큼의 열정을 못 느끼겠더라고요.”

그는 계속 마지막으로 과학 연구에 들끓는 열정을 느꼈던 적을 상기하곤 했는데, 그건 학부 시절 들었던 신경과학 수업이었다. 그 수업에서, 교수님은 가우스 법칙 {Gauss’s Law} 을 이용해서 뇌의 활동을 예측하는 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가장 사랑하는 물리 과목인 회로와 전자기학을, 생물학 수업에서 써먹었더라고요.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어요.”

Hobbs 는, 본인이 예상했던 진로와 본인의 참된 열정 사이에서 갈등했었다고 말한다. “물리학은 어렸을 때부터 즐기고, 늘 탐구했던 분야였어요. 이걸 그만두는 미친 짓 같았죠. 다른 걸 골랐는데 덜 좋아하면 어떡하겠어요? 실험실을 옮겼는데 마음에 안 들면?”

Hobbs 는 이런 걱정 외에도, 신경과학처럼 다른 어려운 분야로 간대도 물리학을 떠나는 것이 곧 실패하는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다고 한다. “입자물리학만이 진짜 어려운, 유일한 과학이다, 뭐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과학계에서의 여성으로서, 전 늘 남들보다 더 잘 해야할 것만 같았어요. 다들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신경과학으로 분야를 바꾸는 건, 입자물리학에서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 같았어요. 다른 남성 과학자들과의 경쟁에서 진 것 마냥.”

몇달의 이런 고민 끝에, Hobbs 는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내 열정을 따르는 건, 내가 남들보다 능력이 부족하단 게 아냐. 내 열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성공이 무엇인지, 그건 남이 정하는 게 아냐.”

Hobbs 는 그렇게 신경과학으로 전공 분야를 바꾸게 됐다. 그는 뇌가 촉감을 어떻게 처리하고 부호화하는지를 연구했다. 이 연구를 하면서 그는 머신러닝을 배우게 됐고, 데이터 사이언스라는 분야가 떠오르기도 전에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서의 능력을 기르게 되었다.

처음엔 학계 밖의 고용주들에게 본인의 능력을 알리는 게 어려웠지만, Hobbs 는 결국 보험사에서 위험 평가/분석을 하는 일자리를 얻게 됐다.

또, 그는 1년 만에 현재의 직장인 STATS 라는 회사로 이직해서, 스포츠 데이터를 활용해 선수들의 실적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일을 한다. “스포츠 경기라는 것도 결국 다양한 데이터를 내놓는, 수백개의 실험 같은 거거든요.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행동 양상을 보이는지 알 수 있어요. 과학자에겐 꿈과 같은 데이터셋이죠.”

기초 입자에 대해 꿈꾸던 3학년 시절, Hobbs 는 이 여정이 본인을 어디로 이끌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기존에 하던 일을 떠나 새로운 일을 할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그는 그냥 도전하라고 조언한다.

“불안해도 괜찮아요. 너무 편한 상태에 있으면, 많이 배우지 못하고 있는 거에요. 열정을 쫓고, 본인의 능력을 더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찾아가야해요.”

Dongwook Jang

학생 시절, 장동욱씨는 수학을 잘 했지만, 그걸 어떻게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지 잘 알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여전히 어떤 커리어를 가져야 할지에 대한 그림이 안 그려지더라고요. 일단 시간을 좀 더 벌기 위해, 물리학 석사 과정에 진학했어요.”

한국 연세 대학교에서의 석사 과정 중, 장씨는 고에너지 입자물리학을 발견하게 됐다. 그리고 1999년, 그는 미국 럿거스 대학교 {Rutgers University} 에서 물리학 박사 과정을 시작하게 됐다.

“학계 내에 있으면 안전한 느낌이었어요. 뭘 하고 살 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열심히 연구하다보면 교수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죠.”

박사학위를 끝내고 5년의 포닥 과정 끝에도, 장씨는 결국 정규직 과학자로서의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학계 내에선 선택지가 너무 적어요. 이를 위한 경쟁은 엄청났고, 결국 물리학계를 떠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장씨는 본인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물리학계를 떠난 지인은 대부분 금융계로 옮겨갔어요. 포닥 과정 중, 금융 회사에 지원해봤지만, 진입 장벽이 굉장히 높았어요. 컴퓨터 과학, 통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했고, 프로그래밍 언어도 여러 개를 능숙하게 다루길 원하더라고요. 무슨 슈퍼히어로를 찾는 것 같았죠.”

또, 미국이 집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장씨는 미국 시민이 아니었다.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었기에, 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았다.

“CERN 에 있는 친구들 중, 비슷한 처지에 놓인 친구들이 있긴 했죠. 근데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간 걸로 알고 있어요. NIW {National Interest Waiver, 일명 고학력자 독립 이민, 미국 사회에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 영주권을 주는 제도} 지원하는 게 서류도 엄청 많이 필요하고, 돈과 시간도 꽤 들어가요. 전문 변호사를 고용해야했어요.”

물리학 연구를 계속하면서 2년을 기다린 끝에, 장씨는 마침내 미국 영주권을 획득했다. 또 장씨는 100개 이상의 일자리에 지원했고, 전화 인터뷰만 50번, 현지 인터뷰만 10번이나 진행했지만, 여전히 본인이 가진 능력과 회사가 기대하는 바가 다름을 느꼈다.

“인터뷰들이 대부분 잘 안 풀렸어요. 컴퓨터 과학, 알고리듬, 데이터 구조, 그리고 그 외 프로그래밍 관련 개념들에 대해서 어려운 질문들을 하더라고요. 분명 제 물리학 커리어에 관심이 없었어요.”

장씨는 결국 접근법을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고에너지 물리를 떠난 친구들과 대화를 했고, 그 중 한명이 본인의 사무실에 일자리가 있다고 했다. 장씨는 그렇게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네트워킹이 굉장히 중요해요. 이 회사에는 이미 입자물리학자 출신 직원들이 있었고, 우리가 어떤 능력을 가졌고, 회사에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는지를 잘 봤던 것 같아요.”

장씨의 산업계로서의 전환은 머신러닝 붐과 맞아떨어졌고, 머신러닝은 그가 물리학계에서 기른 수학 능력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오늘날 그는 머신러닝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운전 양상을 분석하고 교통 체증을 예측하는 일을 한다.

“지금 제 일은, 포닥 때 제가 하던 일과 굉장히 비슷해요. 똑같은 류의 데이터 분석을 하는데, 운동량과 에너지 대신, 위치와 속도를 분석하는 거죠.”

그는 현재 일로부터 얻는 도전과 만족에 놀랐다고 한다. “물리학계를 떠나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불안했었어요. 하지만, 몇달이 지난 지금, 마음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학계 밖엔 전혀 다른 삶이 있었고, 일과 삶의 균형 {work-life balance} 도 엄청 좋아요.”

비록 장씨는 본인의 고향과 물리학계를 떠났지만, 그는 지금 본인이 있는 곳에 소속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제는 미국이 집 같아요. 여기서 결혼을 했고, 여기서 학교를 다니는 아들이 있고, 여기서 직장을 다니는 걸요. 이곳이 집이 아니면 어디를 집이라고 하겠어요?”

Thomas Gadfort

물리학계 내에서라면, 그 어떤 기준으로 따져도 Thomas Gadfort 는 성공한 물리학자였다. 2012년, 그는 브룩헤이븐 연구소 (Brookhaven National Laboratory) 에서의 포닥 자리를 떠나, 페르미랩에서 과학자 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아내는 첫 아이를 가지게 됐다.

“원하든 원치 않든, 아이가 생기는 순간, 삶은 변해요. 제 삶 전반, 그리고 인생의 방향성에 대한 중대한 생각을 해야했죠.”

Gadfort 의 삶 대부분 동안, 인생의 방향성은 분명해보였다. 그가 다섯살이었을 때, 핵물리학자인 아버지의 일 때문에 그의 가족은 코펜하겐에서 미국으로 이민왔다. “뭐가 뭔지 알기도 전에, 입자물리의 표준모형에 대한 포스터가 제 방 벽에 걸려있었어요. 물리학은 자연스레 고향 같은 곳이 됐죠.”

Gadfort 는 연구자로서 훌륭한 실적을 냈다. 하지만 점점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그 길이 본인의 열정과 멀어지고 있음을 보았다. “자연스레 다음 자리로 갔다면, 리더의 자리에 서고, 여러 프로젝트를 관리하게 됐을 거에요. 그리고, 솔직히 그런 일은 제가 원했던 일이 아니거든요. 플롯을 뽑고, 디테일을 하나하나 이해하는, 포닥 과정을 차라리 계속하고 싶었어요.”

이런 생각에 추가로, Gadfot 는 성공적인 물리학계 커리어와 만족스러운 가족과의 삶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는 가족에 충실하고 싶었어요. 주말에 일한다던가, 출장 자주 다니는 일 없이요. 그런데, 잦은 출장 없이, 제가 원하는 물리학 커리어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더군요.”

페르미랩에서의 2년, 그리고 몇달 간의 미래에 대한 고민 끝에, Gadfot 는 결국 새로운 발걸음을 딛어 데이터 사이언스 세계로 들어서기로 했다.

“처음에는 많이 불안했죠.” 4년이 지난 지금 그게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그지만, Gadfort 는 “이직 직후엔 진짜 잘 모르겠더라고요.” 라고 말한다.

사기업에서 첫 직장을 다니면서, Gadfort 는 그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서 필요한 기초 능력들은 가지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기술들이 없음을 깨닫게 됐다. “Python 으로 코딩할 줄을 몰라서, 그때 그때 배워야했어요. 또 잘 모르는 복잡한 구조의 데이터를 다룰 일이 많았는데, 물리학자로서 했던 일들은 아니었죠.”

Gadfort 는 또 마감일과 상품 등이 가득한, 틀에 맞춰진 직장 문화에 적응해야했다. “포닥 땐, 제 스스로 제 시간을 관리하면 됐어요. 갑자기 꽂힌 문제를 풀든, 코드를 다시 짜든, 제가 원하는대로 하면 됐죠. 하지만 회사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아요.”

물리학계에서 회사로의 전환이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학계를 떠나는 것이 물리학자로서의 본인한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리학 공부를 했을 땐, 그 커뮤니티의 일부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어요. 유명한 물리학자들에 대한 글을 읽고, 최신 물리학 소식들을 다 읽었죠. 저한테 의미있는 것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학계를 떠나 직장 생활을 하는 지금도, 그는 여전히 그런 글들을 다 읽는다. “물리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을까, 했던 건 헛고민이었더라고요. 더 이상 Z 보존이나 탑 쿼크 데이터의 플롯을 만들진 않지만, 그건 별 상관없어요. 저는 여전히 스스로를 물리학자라고 생각하고, 물리학은 늘 사랑할 거에요.”

새로운 커리어에 적응하면서, Gadfort 씨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서의 일이 본인이 포닥으로서 굉장히 잘 했던 일과 다행히 똑같음을 알게 됐다. 데이터를 분석하고, 플롯을 만드는 일이다. 그는 이제 데이터를 통해 운전자의 행동 양상을 분석하고, 교통사고가 일어나는 원인을 밝히고, 더 안전한 도로를 설계하는 일을 한다.

물리학계를 떠나면서, Gadfort 씨는 또 다른 중요한 목표를 이루게 됐다. 건강한 일과 삶의 균형이다.

“작년엔, 저희 딸 축구 팀 코치를 맡았었어요. 커리어 밖에도 기쁘고 뜻깊은 일들을 많습니다.”